여행記/2008, 유럽

7월 24일, 이딸리아 로마 - 싼 삐에뜨로 광장과 꾸뽈라, 빵떼옹, 뜨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

클라시커 2008. 7. 25. 06:50
  아침 일찍부터 바티칸으로 향했다. 엊저녁 바티칸 투어가 너무 늦게 끝나, 싼 삐에뜨로 대성당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끝내고 떼르미니 역에서 64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는 출근을 하려는 이딸리아인들로 북적댔다. 외지인을 바라보는 어색한 시선들을 즐기며 로마의 아침햇살을 받았다.

  광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바티칸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이딸리아의 모든 관광지의 상태가 요새 다 이렇다. 조금 유명하다 싶은 곳은 표 사는 데만 한, 두시간 정도를 들여야 한다. 근데 그게 사람이 많아서기도 하지만, 이딸리아인들 자체가 좀 느긋한 탓도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대기자가 많으면 다른 카운터를 열어서라도 입장을 시키지만, 얘네들은 그냥 그대로 간다. 이걸 그리스에서도 느꼈는데, 정말 남부지방애들 느긋한 건 알아줘야겠다.

  로마의 황제들은 저마다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해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반출해왔다. 실제로 현재 이집트의 국보급 오벨리스크들은 이집트보다 이탈리아, 이탈리아보다는 로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싼 삐에뜨로 광장에 서 있는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칼리쿨라 황제가 가져와 네로네 집 앞에 서 있던 것을 교황 식스투스 5세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우리로 치면 원래 불국사에 있던 다보탑이 일본 신사의 중심에 서 있는건데, 일단 웅장함은 인정해야겠지만 그 역사가 그닥 아름답지는 않다.

  원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태양신인 '라'를 숭배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신전이다. 그런데 싼 삐에뜨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그 머리 위에 십자가를 지고 있다. 호사가들은 '드디어 그리스도교가 이교를 굴복시켰다'는 의미로 세워놓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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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시 금속탐지기를 지나가서 서둘러 꾸뽈라로 향했다. 두 다리 튼튼하니 당연히 5유로내고 걸어올라갔다. 앞서도 말했지만, 승강기 타봐야 절반 정도의 계단을 회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처음 계단들은 그 높이와 기울기가 낮아서 그냥 평지를 걷는 기분이다. 승강기에서 내려서 맞는 계단은 높이도 높고 경사도 급할 뿐더러 가끔은 굽어있기까지 하다 -ㅅ- 그러니까 그냥 2유로 아끼고 그 돈으로 차라리 물을 사 마시자. 땀도 흘리고, 물도 마시니 이것처럼 완벽한 운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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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뽈라 정상에 올라가는 계단, 이게 처음 만나는 계단이다.


  꾸뽈라 정상에 올라가니 로마 시내가 한 눈에 보일 뿐더러,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바티칸의 부분들도 보인다. 여전히 바티칸의 많은 부분이 비공개 상태인데, 한 종교의 중심지인데다 이렇게 비밀스럽기까지 해서 일반인들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많이 자극하고 있다. 다빈치 코드나 미켈란젤로의 복수와 같은 음모론 짙은 소설은 그런 사례다.

  싼 삐에뜨로 광장은 마치 열쇠구멍처럼 생겼다.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도상이 '열쇠'[각주:1]이니, 꽤 맞는 설명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에 십자가가 있음을 착안해 예수님이 두 팔을 벌려 바티칸을 찾는 백성들을 안는 모양이라고도 설명한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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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뽈라에서 내려오니 바로 성당 내부로 연결된다. 싼 삐에뜨로 성당에서는 지금도 교황님이 일주일에 한 번 직접 미사를 집전하신다. 그 교황 성하 전용의 제대는 17세기 최고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베르니니가 만든 청동기둥에 둘러싸여 있다. 가이드북에 의하면, 베르니니는 이것을 만들기 위해 빵떼옹의 청동을 뜯어냈다고 하는데 로마 시민들이 이를 가리켜 '오랑캐도 하지 않은 일을 베르니니가 한다'며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교황님의 제대 아래에는 베드로 성인의 무덤이 있다. 네로는 네로경기장에서 베드로 성인을 거꾸로 매달아 죽였는데, 후에 네로경기장 자리에 베드로 성인의 유해가 있을거라 추정하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 싼 삐에뜨로 대성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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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이 좋았는지, 성당 한 켠에 있는 제대에 아무 생각없이 앉았는데 신부님이 냉큼 들어오시더니 미사를 집전하신다. 성가도 없고, 이딸리아어로 진행되는 터라 감을 잡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갈까말까 고민하다 그냥 듣기로 했다. 벽을 향한 제대에서 드리는 미사를 볼 기회가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신부님들이 신자들을 바라보며 미사를 집전하시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모든 미사가 벽을 바라보며 - 정확히는 고상을 바라보며 - 진행되었다. 때문에 모든 제대가 벽에 붙어있었다. 더 웃긴건, 이 공의회 이전에는 그 이전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된 바대로, 라틴어로 작성된 불가타 성경만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전례가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문맹률도 높을 때에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가 일반 대중에게 쉬울리가 없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이렇게 난감한 것을 결의한 까닭은 이것이 당시에 불어닥치던 종교개혁의 바람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즉, 루터가 시장바닥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에 교회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교황의 허락 없이는 무조건 라틴어로 된 성경을 사용하게 함으로서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각주:2]는 앞서의 트리엔트 공의회와 달리 가톨릭의 보편화와 혁신을 꾀했다. 각 국가의 민속신앙을 인정함으로서 조선시대 때 천주교 박해의 빌미가 되었던 제사 금지의 규율을 깨뜨렸으며, 미사 전례를 각 국가의 언어로 진행할 수 있게 하며, 다른 종교와의 화합을 강조했다. 특히나 옵서버로 참여한 동방정교측에 동방정교와 서방정교(가톨릭)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동서 파문 사건'에 대해 사죄하고, 서로 파문을 해제할 것을 결의함으로서 하나의 그리스도교가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디뎠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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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니 지하무덤으로 가는 길이다. 전 교황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한때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곳을 찾는 신자들을 위해 무덤을 무료로 개방했다고 하는데, 오늘이 날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전략을 바꾸었는지 박물관과 묶아 1인당 6유로를 내야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어차피 사용되어봤자 바티칸에서 사용될 것이기에, 신자인 나로선 별 저항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만 두고 서둘러 돌아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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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한 켠에는 이렇게 큰 고해소도 있었다. 몇몇 신자분들이 고해를 하러 들어가시더라는... 물론 이탈리아어였겠지만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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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칸의 경비는 오로지 스위스 용병만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이 입은 옷이 꽤 촌스러운데, 수백년 전에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거라 쉽게 못버린다고 한다. 은근히 앙 선생님 스타일인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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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칸을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이 있는 뽀뽈로 광장으로 향했다. 로마제국 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광장을 거쳐야 로마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전차로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는 말이 있는 것 아니겠는감?[각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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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실 걷다보니 어언 스페인 광장. 여기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떤 음식도 이 계단에서 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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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떼르미니 분수. 사람이 너무 많아 목욕탕 같다. 동전 던질까 하다가 참았다. 참 돈이 이것저것 사람들 꽤 구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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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기원전 20년경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집정관이었던 아그리파가 지은 것을 5현제 중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가 개축했다고 한다. 현재 로마에 남아있는 고대 건축물 중 가장 상태가 좋은 것으로 평가된다고. 지금은 교황의 소유로 넘어가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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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테온 주변에는 로마의 3대 젤라또 집이라 손꼽히는 지올리띠가 있다. 하나는 바티칸 주변에 있는 올드브릿지고, 하나는 떼르미니역 근처의 파시다. 세 젤라또집 모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지올리띠는 멜로네(멜론), 올드브릿지는 바나나, 파시는 로조(쌀) 젤라또가 특성화 되어 있다. 오늘 이 지올리띠를 방문함으로써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는데, 가격대 맛으로 치면 파시가 최고다.

  젤라또를 쪽쪽 빨며 몬테치토리노 광장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엿듯다보니 - 난 내가 이탈리아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오늘 알았다! - 이탈리아의 현 총리인 베를루스코니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얼른 지도를 펼쳐보니, 이곳이 바로 이탈리아 총리의 관저였다. 웃긴게 총리 관저가 사람들이 젤라또 쪽쪽 빨고 있는 광장 바로 옆이다. 어떤 나라의 관저는 시민들이 들어가겠다는데도 닭장차로 막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정치 지도자와 만날 수 있는 나라도 있다. 하긴, 몇 나라 가보진 않았지만 영국 총리의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도 달랑 문 옆 골목길만 경찰이 막고 서 있을 뿐이고 그리스의 대통령궁도 근위병 몇이 앞을 지키고 있을 뿐 일반인이 통행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권위가 없는 것도 아니다. 고든 브라운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각국의 지도자를 넘어 유럽대륙의 지도자로 손꼽히고 있다. 굳이 누구처럼 주변에 자기 사람을 심고, 특히나 경찰청장에 주구(走拘)를 심지 않아도 그렇다. 지도자의 권위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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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문을 열고닫는 열쇠를 맡기셨다는 성경구절에 착안해, 많은 화가들이 베드로임을 나타낼때 열쇠를 들려보낸다 [본문으로]
  2. 바티칸 공의회는 두 번에 걸쳐 열리는데,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당시의 근대 무신론적 사조에 저항하는 아주 보수적인 내용들을 결의했었다. 전쟁으로 인해 정회했기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릴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실제로 현재 로마의 떼르미니 역은 모든 나라로 가는 열차가 서는 교통의 중심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