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記/2015

국정교과서는 과연 수능 부담을 줄이는가

클라시커 2015. 10. 14. 20:40

- 조선일보, 혼란스러운 학부모들 "단일 교과서가 수능 준비엔 좋겠죠", https://goo.gl/uSUG9l, 2015년 10월 13일 작성.


조선일보가 위와 같은 제호의 기사를 내놨다. 검인정 체제로 다양한 종의 교과서 체제에서는 여러 교과서를 읽어야 하겠지만 국정화 단일 교과서 체제에서는 단 한 권만 읽으면 되니 부담이 덜하다는 류의 논리다. 이에 관해 직접 경험한 것을 반례로 들면 아래와 같다.


1. 수능 출제는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수능을 볼 때는 국사 부분은 국정 교과서였고, 근현대사 부분은 검인정 교과서였다. 금성사 교과서가 좌편향 되었다고 한참 논란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수능을 세 번 보았다. 수능 세 번에, 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하는 공식 모의고사 여섯 번. 도합 아홉 번의 '정부 주재 시험'을 치렀지만, 단 한 번도 '검인정 교과서의 개별 서술로 인해 문제를 풀지 못했다'는 논란이 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널리 알려진대로 검인정 교과서 집필의 기준은 교과부가 내놓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이하 '가이드라인', 첨부 참고)이기 때문이다.


수능을 출제하는 사람들은 현직 교수부터 현직 교사까지 다양하다. 수능시험 문제는 이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합의한 결과다. 이런 합의는 대부분 다수설을 따르게 되어 있다.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소재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에 결정적으로 준거로 작용하는 것이 '가이드라인'이다.


이 '가이드라인'은 단순히 집필 과정에서 참고용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부가 검인을 할 때 심사하는 기준으로도 작용한다. 원칙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고 집필한 교과서는 교과부의 검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지금 문제가 되는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다.


바꿔말하면 지금 검인정 교과서는 가이드라인상 문제가 없어 교과부가 출판을 허락한 교과서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pdf


더욱이 이 '가이드라인'이 새로 제정된 것은 다름아닌 2011년의 일이다. 김대중-노무현 '좌파정부'가 만든 것이라면 모를까, 이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당선되신 이명박 대통령 치하에서 제정된 가이드라인이다. 이쯤 되면, 둘 중 하나를 인정해야 한다. 현행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가 문제가 없다는 것, 아니면 이명박이 '빨갱이'라는 것. '짜장이 좋아, 짬뽕이 좋아'보다 더 어려운 선택일 것 같다.



2. 단일 교과서가 성적 상승을 곧바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술한 대로 내가 수능을 볼 때, 국사는 국정교과서였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처럼 국사편찬위원회 주관으로 발행된 단 한 권의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를 해야 했다. 반면 다른 사회탐구 영역의 과목은 모두 검인정 교과서 체제였다.


만약 조선일보가 학부모들의 입을 빌어 넌지시 말한 논리가 맞다면, 오히려 검인정 교과서 때문에 공부하기가 까다로운 다른 선택과목 대신 국정 교과서 단일종으로 공부하기가 쉬운 국사에 많은 학생들이 몰렸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시험을 보던 3년 내내 국사는 선택 학생수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지 못했다.


물론 국사가 필수 과목이 아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서울대가 자교 입학 조건으로 '사회탐구 성적 중 국사 과목의 성적'을 필수로 내걸면서, 서울대가 목표가 아닌 학생들은 국사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국사에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몰리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몇 개의 오답 때문에 낮은 등급과 낮은 표준점수를 받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사가 필수인 지금 상황은 이 때와 다른 결론이 날 소지도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사례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한국의 입시와 교육정책이 단순히 '교과서의 종류 수'로 판가름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정책이 입안되고 그것이 실제 시행되기 까지는 여러 이해당사자의 합의를 거쳐야 한다. 그러다보니 다소 중간에 붕 뜬 듯한 결론이 날 때도 있지만, 적어도 특정인의 의도에 움직이지 않고 모두에게 조금의 편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민주제의 장점이라면 장점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교과서의 편향적 서술로 수능 준비가어려워 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체제와 수준을 너무 얕잡아 보는 발언이다.


둘째, 이건 사실 좀 미안한 이야기인데 교과서가 100종이든 1000종이든 공부에 뜻이 있는 애들은 상관없이 성적을 잘 낸다. 모든 과목이 국정교과서를 선택해도 아마 지금의 순위는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 모두 검인정 교과서 체제지만 아직까지 특정 교과서를 선택한 집단이 시험에서 유리했다는 유의미한 연구 결과는 본 적이 없다. '단일 교과서가 수능 준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하려거든, 먼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의미있는 연구부터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근거없는 주장은 선동이다'라는 것이 이제까지 당신들이 이쪽을 비난하며 들고 나오던 논리 아니던가. 늦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근거를 제시해주면 될 것 같다.



이런 간단한 논증에도 논박당할 만큼, 조선일보의 이 주장은 참 어설프다. 입시, 그리고 이후 살아가는 과정에서 남의 말에 의존해서 내 입장을 결정하는 것만큼 스스로를 호구로 만드는 일이 없는 것 같다. 학부모들께서는 지금 당장 이 일이 내 아이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논술 실력은 하루 아침에 뚝딱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니, 수능 이후 논술 체제를 대비하신다는 차원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시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