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주변사논고'는 간단히 말해 성대 주변의 건물, 길 등에 담긴 역사를 톺아보기 위한 연재물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하기는커녕, 11월 16일의 산책 과정에서 불쑥 튀어나온 프로젝트라 사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쓸거라고는 장담 못하겠습니다. 즉, 쓰기 싫으면 언제든 때려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입죠. (...) 물론 주제는 벌써 열 한 개나 생각해뒀습니다만, 역시 그게 언제 글로 화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다섯 개만 미리 적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물론 변동 가능성이 있습니다.)
1편과 2편의 주제는 주변인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모를겁니다만, 여튼 좋은 주제를 정하도록 도와준 그 사람에게 앞 두 편은 헌정을 하도록 합니다. (역시 이런건 생색을 내는 겁니다만, 문제는 자기가 뭘 도와줬는지 모르니까 읽지도 않을겁니다.)
자, 그럼 이제 떠나볼까요?
제1주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 제2주제 종로1가 사거리 일대 / 제3주제 대학로 일대 / 제4주제 백악산과 서울성곽, 그리고 김신조 / 제5주제 낙원시장 일대
1편과 2편의 주제는 주변인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모를겁니다만, 여튼 좋은 주제를 정하도록 도와준 그 사람에게 앞 두 편은 헌정을 하도록 합니다. (역시 이런건 생색을 내는 겁니다만, 문제는 자기가 뭘 도와줬는지 모르니까 읽지도 않을겁니다.)
자, 그럼 이제 떠나볼까요?
성균관의 역사는 어디에 맥을 닿느냐에 따라 달리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 '성균'이란 이름이 최고학부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을 연원으로 본다면 1289년 고려 충렬왕 대부터라고 볼 수도 있겠고요. 현 위치를 기점으로 생각한다면 조선왕조에서 성균관을 처음 설치한 1398년을 연원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균관대학교의 경우에는 후자를 따라 개교년을 1398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조에서 성균관은 어떤 역할을 했느냐. 이 곳은 일종의 국립대학교이자, 왕조의 권위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씽크탱크의 역할을 했습니다. 기능적으로는 소과에 급제한 유생들이 대과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오는 일종의 기숙형 관료양성소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잠시 딴 이야기를 하죠. 모두 조선의 관료등용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대강 아실 것입니다. 생원이니, 진사니 하는 호칭은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거 왜, 제가 막 한 두 번 불렀던 조영남 번안곡 '최진사 댁 셋째 딸'의 그 진사 말입니다. 이 호칭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생원시와 진사시가 바로 소과(小科)입니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식년(式年, 3년)마다 치러졌는데 생원시는 사서오경을, 진사시는 문예창작의 재능을 물었습니다. 이 소과에 합격을 하면, 대망의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물론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아도 대과를 치를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대과 합격인원이 적었고 (33명), 그마저도 대부분 성균관 출신 유생들이 합격했기에 소과 합격자들이 성균관에 입학해 대과 준비를 하는 것은 일종의 '왕도'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잖아요? 법대나 법학원 안 다녀도 사법시험에 응시하거나 합격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법학과에 진학하거나 법학원에 등록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잖아요. 이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
▲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입니다. 우리는 이 많은 건물 중 단 몇 개만을 보고 지나갑니다. (출처 : 성균관)
서재와 동재 앞에는 돌단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는 유생들이 스스로의 나태함을 꾸짖기 위해 회초리를 들었던 곳이라고 하죠. 성균관 유생들은 의식주부터 모든 것을 국가에서 대주는, 일종의 국비장학생인지라 한 달에 30번 이상씩은 꼭 시험을 봤다고 합니다. 1년에 단 네 차례만 시험을 봐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게 시험인데, 그걸 한 달에 서른 번씩이나 봤다니... 이런 데이터들을 모아 일정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는 유생은 성균관에서 퇴출을 시켰다고 하는데, 이 기준을 찾기가 어렵네요. ('성균관 퇴출'이라는 키워드를 구글에 넣으면 맨 박민영과 박유천, 전태수의 이름만 나오니... -_-;;;)
서재와 동재 이야기를 했으니까, 성균관의 다른 건물 이야기도 해볼까요? 성균관에서는 학문수양 말고도 선현을 모시는 일도 했는데, 그 중심건물이 바로 대성전입니다. 대성전에는 공자 선생님을 비롯한 39명(공자와 4성, 공문 10철, 송조 6현, 한국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양반들(!)에게는 매년 2월과 8월에 '석전제' 혹은 '문묘제'라는 제사를 올립니다. 여기서 연주하는 음악이 바로 '문묘 제례악'인데, 재밌는건 이 문묘 제례악이 정작 공자 선생님의 고향인 중국에서는 청조 말의 혼란과 공산주의 국가의 수립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잊혀진 유산이란 겁니다. 유교문화의 변방국이었던 일본에 이런게 있었을 리는 없고요. 그러니까 이 문묘 제례악의 원형은 유일하게 남한에만 남아 있는 거죠.
대성전 앞을 볼까요? 세 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와 다섯 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가 좌우로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아마도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고, 후대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져다 붙인 이야기겠지만 참으로 공교로운 가지의 수 때문에 이 두 나무는 각각 '삼강목'과 '오륜목'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수종은 측백나무인데, 올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유교에서는 소나무와 함께 군자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제 발걸음을 옮겨 대성전 뒤로 가보죠. 대성전 뒤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수령이 벌써 500년은 되었다(1519년에 심었다고 합니다)고 하는데, 공자 선생님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종종 은행나무 밑에 좌판을 깔으셨다고 해서 유교를 가르치는 국립학교(성균관, 향교)에는 꼭 이 은행나무를 심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천연기념물로 등록된 나무들이 암나무인데 반해, 이 나무의 경우엔 수나무입니다. 사실 가을이 되면, 은행 녀석들도 나름 종족번식을 해야겠기에 신나게 은행을 주렁주렁 달고 떨어뜨리는데 만약 이 나무가 암나무였다면 대성전 안팎은 온통 구린내로 진동했겠죠. 그러니까 4년을 다녀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이들이 수나무인게 무척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묘목일 때 암나무인지 수나무인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4
은행나무의 건너에는 명륜당이 있습니다. 명륜당은 성균관에 기거하는 모든 유생들에게 강의를 하던 일종의 강당으로서, 간혹 이곳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성균관대학교와 성균관이 위치한 명륜동이란 이름의 어원이 되는 건물이기도 하고요. 한자를 풀어보면 밝을 명(明)에 도리 륜(倫)으로, '도리를 밝히라'는 쯤의 뜻이 되는데 성균관의 정치-사회적 위치와 참으로 잘 맞는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 이제 명륜당 뒷편으로 돌아가보면 한국 대학도서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존경각'이 있습니다. 성균관 존경각에는 한때 수 만 권의 유학 관련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국운이 기울던 조선 후기부터 장서 규모가 줄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도서를 전부 이관했습니다. 뒤이어 이야기 할 비천당과 함께, 존경각은 성균관 개설 당시에 건축된 것은 아니며 성종 6년(1475)에 한명회의 건의로 건립된 것입니다. 성종이 하사한 책 1만 권과 함께 개관한 성균관은 중종 9년(1514)에 소실되었다가 복원, 이후 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하고, 영조 48년(1772)에 개수하였습니다. 기본 장서는 사서오경 · 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 서적 위주였으며, 불교 · 도가나 기술 서적은 '잡서'로 취급되어 소장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존경각의 우측에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육일각'이 있습니다. 육일각은 영조 19년(1743)에 건립되었으며, 성균관 내에 있는 활과 화살,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각종기구를 보관하였다. 고대 유교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숭상하였기 때문에 육례(六藝 : 禮·樂·射·御·書·數) 중에 하나인 활쏘기[射]를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생각하여 유생들에게 장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죠. 왜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4인방이 열심히 활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그럼 이제 존경각 왼쪽으로 난 입구를 통해 나가볼까요? 예전에는 흙으로 덮혀 있었을 법하나, 이제는 아스팔트로 덮힌 평지가 나오고 다소 뜬금없이 서 있는 '비천당'을 발견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비천당 역시 성종 때 건립되었으며 과거시험장으로 쓰였다고 하니 비천당 앞의 너른 마당이 왜 존재하는지 알 것도 같지요.
자, 이제 성균관 구경은 다 한 듯 싶습니다. 이제 발걸음을 언덕으로 옮겨 성균관대학교로 가보아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좀 쉬었다 가죠. 쉬기 전에... 성균관대학교의 정문으로 들어와 바로 왼 편에,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는걸 보셨나요? 네, 눈이 좋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것이 바로 영조가 세운 그 유명한 '탕평비'입니다. 정치를 할 관료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던 만큼, 탕평의 도를 제1국정지표로 삼았던 영조가 탕평비 건립에서 이 곳을 빼놓을 수는 없었겠죠. 아, 마침 탕평비 뒤쪽으로 쉴 만한 공간도 있네요. 다시 정문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성균관대 학우들이 '청룡상 있는 데'라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 잠깐 커피 한 잔 하셨다가 슬슬 성균관대 쪽으로 시선을 옮겨봅시다. 5
성균관대학교 편으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어디까지 왔나?]
성균관
- 물론 이외에 국가에 큰 경사가 있는 것을 기념해 치뤄진 증광별시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 최준석, '성균관'. <네이버캐스트>, NHN Corp., 2010년 7월 29일 작성. 2011년 11월 16일 확인. [본문으로]
- 하지만 성균관 측이 제시한 수를 보면 28개입니다. 최준식 교수는 직접 세 보았다고 하는데, 아마 두 개의 방은 방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요. [본문으로]
- 국립산림과학원의 2010년도 3월 4일자 답변. 네이버 지식IN에서 재인용.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105&docId=105603507&qb=66yY66qpIOyVlOyImCDqtazrtoQ=&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VgY4c5Y7uRssvvkUA0ssc--021788&sid=TsTvF5DPxE4AAGY3THI [본문으로]
- 정문 왼 편에 있는 것은 하마비로 밝혀졌습니다. 탕평비는 성균관 안 쪽에 존재하더군요. (2011년 11월 21일 작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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